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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의 시작! 자인빌리지

2023.10.1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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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첼은 라일리의 명령을 받고 리즈에게 새 보금자리를 안내해 줬다.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별관은 방이 많이 남아돌아 그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써도 좋다고 했고, 짐을 푸는 것도 도와준 채 자는 걸 확인한 다음 복귀했다. “아가씨, 그 아이 조금 전에 잠들었어요.” 리즈는 한참을 울었다. 서러움에 흘리는 눈물은 아닌 듯했다. 계속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눈물샘이 말라 더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잘못을 비는 걸 멈추었다. “그래, 앞으로도 네가 잘 감시하렴.” “예, 걱정 마세요 아가씨. 그런데……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예요?” “뭐가?” “저 아이요, 정말 믿을 수 있을까요? 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가씨께서 가족분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아니까…… 전 주인을 배신하고 쫓겨난 거래요. 주인의 물건을 훔쳐 쫓겨났다는데 그런 사람을 곁에 둬도 될지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말렴, 리즈가 물건을 훔친 게 아니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라일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계획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저 아이는 앞으로 쓸 만할 거야. 여기서 지내는 동안 잘 대해주렴.” 리즈는 원래가 클레어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게 높은 아이였다. 물론 그 충성심이 클레어를 향한 동경과 애정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옛 기억을 더듬어보면 리즈는 항상 지나치게 클레어의 시선을 의식했다. 클레어의 눈에 띄기 위해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솔선수범하는가 하면, 그녀가 뭘 좋아할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눈치껏 먼저 행동하고는 했다. ‘……그 행동에 나를 괴롭히는 것도 포함이었을 거고.’ 클레어는 라일리를 끔찍하게 싫어했고, 리즈가 라일리를 괴롭힐 때마다 뒤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칭찬을 꽤 자주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마다 리즈는 사랑받는 강아지처럼 뿌듯해했지. 그 충성심이 정말 클레어라는 인간이 좋아서 나온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일방적인 관계였을 뿐. 그 결과로 클레어는 리즈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쳤다. 리즈가 다시 클레어에게 돌아갈 확률은 낮다. 이미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내쫓긴 마당에 그곳에 아직도 설자리가 남아 있다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겠지. 그렇게 오갈 데 없어진 리즈는 좋든 싫든 이곳에서 뼈를 묻으려 할 것이다. 게다가 에아달린 가문의 사용인들 대다수는 리즈가 이번 일의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클레어가 리즈를 내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리즈는 계속 에아달린 가문의 사용인들과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리즈는 그곳에서 오래 일했고 다른 사용인들과도 친했으니까. 리즈의 가치는 이걸로 충분하다. 에아달린 가문의 사용인들과 쉽게 교류하면서 정보를 물어다 줄 역할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이었다. ‘클레어가 예상대로 움직여줘서 정말 다행인 일이지.’ 잘만 구슬린다면 리즈는 아주 쓸 만한 심복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라일리는 리즈를 아주 잘 구슬려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아이였다. 클레어와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주인이라는 걸 각인시키고 곁을 벗어나지 못하게만 한다면 아주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주겠지. 원래가 손이 빠르고 입이 무거운 야무진 아이였으니까. 괴팍한 클레어의 밑에서 버틸 만큼 인내심이 있는 아이이니 곁에 두면 분명 두고두고 쓰일 터. 리즈의 쓰임새를 생각한다면 과거의 해묵은 감정 정도는 털어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 · · “그래서 그 하녀를 저택에 들였다?” “예.” 삭의 말에 기브넨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흥미롭네. 그런 묘수를 내다니.” “도둑 누명을 쓰고 맨몸으로 쫓겨난 걸 바로 데려왔답니다. 아마도 그 모든 상황을 아가씨께서 의도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라일리의 여태까지 행보를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은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기와 다르게 아주 거침없군. 그렇게 많은 기대를 건 게 아닌데 솔직히 많이 놀랐어. 기대 이상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항상 에아달린 가문의 일에는 소극적이었던 태도가 불과 엊그제인데,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군.” “이번에 겪은 일로 인해 심경의 변화가 큰 게 아닐까요? 생명의 위협을 크게 느낀 일이기도 하고, 적의 존재를 확실히 깨닫기도 했을 테니 ‘위험’에 좀 더 예민하게, 또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된 건 아닐까 싶습니다.” 확실히 이번 환영회 때의 사건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지만, 라일리에게는 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 좋은 쪽의 변화임은 분명했다. 여태까지의 그녀는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소극적인 면모가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나서니 상황이 꽤 재밌게 흘러간다. 에아달린 가문 쪽 사람을 매수해놓는 게 좋겠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행동으로 옮긴 걸로도 모자라, 정말로 사람 하나를 제 쪽으로 끌어들이다니. 빠른 실행력, 효율적인 진행 방향, 마무리까지 군더더기 없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최소한의 효율로 최대한의 결과를 이끌어낸 방식은 여태까지 그녀의 이미지와 상반되어 꽤 흥미로웠다. “에아달린 남작은 요즘 어떻지?” “아,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얼마 전 또 에르메인츠 백작의 소유 살롱에서 은밀히 접촉한 듯 보입니다. 대화 시간은 30분 남짓, 길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이와 접촉한 적은 없습니다.” “에르메인츠 백작은?” “그는 어째서인지 요즘 다시 사교활동을 활발하게 시작하는 듯 보입니다. 건강 상태도 꽤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네.” 기브넨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마도 그는 에르메인츠 백작이 세상을 떠나는 날 성대한 파티를 열지 않을까. “얌전히 집구석에 처박혀있던 노인네가 무슨 믿는 구석이 생긴 건지, 내 신경을 살살 긁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이게 뭘 뜻할까.” “그냥 원래가 참을성 없고 막 나가는 양반이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지난번 일은 마정석 로열티를 인상하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더 눈치 볼 것이 없다고 생각된 거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다고 쳐도 에르메인츠 백작이 다른 이도 아닌 에아달린 남작과 계속 교류하는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긴 합니다.” 라이언은 어쨌거나 이제 리안스터 가문과 사돈이 될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르메인츠 백작에게 라이언의 존재는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노인네 성격상 이미 파혼으로 한 번 뒤집어진 전력이 있기 때문에 라이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일 것이다. 애초에 에르메인츠 백작은 싫어하는 놈은 아예 상종도 안 하기로 유명했다. 물론 기브넨의 경우에는 싫으나 좋으나 사업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는 인물이라 아예 상종을 안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불호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는 했다. 똥 묻은 주둥이를 아무렇게나 놀리며 사람을 긁어대는 것은 그의 주특기로 이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리셉션 때의 일만 떠올려도 그 지랄맞은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그가 굳이 사업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지도 않고, 신분, 집안의 격차가 뚜렷한 데다 이미 한 번의 악연이 있는 라이언과 굳이 교류하는 이유가 뭘까. 라일리 때문인 걸까. 또 지난번처럼 뒤로 음흉한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 “에아달린 남작은 에르메인츠 백작을 통해 제 사업을 도울 만한 사람들을 계속 소개받으며 인맥을 차차 넓혀가는 게 목적이겠지만, 에르메인츠 백작이 이렇게까지 해서 에아달린 남작에게 얻을 만한 게 뭔지 모르겠어.” “라일리 아가씨와 관련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굳이 그와 교류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이미 납치 살해 교사가 발각된 시점에 굳이 그런 무리한 행보를 두는 건…… 너무 멍청한 짓이 아닙니까.” 그렇지. 제아무리 총기가 흐려졌다고는 해도 아직 정신이 가락하는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에르메인츠 가문의 가주였고 노장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에게는 어찌 됐건 노련미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예전 같지 않은 건 맞지만, 이미 한 번 ‘약점’을 제대로 잡힌 시점에서 또 같은 짓을 반복할 정도의 머저리는 절대 아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뒤가 구린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아니면 역시 배후가 있으려나. 굳이 짐작해 보자면 그때 라일리를 납치했던 그놈들일 확률이 높겠고.” “예? 어째서 그렇게 연결 지으십니까?” “라일리에 대한 정보가 어디론가 흘러갔다면 그 출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에르메인츠 백작일 확률이 높잖아.” 애초에 라일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극소수. 그마저도 결혼할 만큼 깊은 사이라는 걸 아는 건 정말 손에 꼽을 정도. 학술원의 교수들은 라일리가 그저 기브넨의 눈에 든 장학생인줄 알고 있을 뿐이며 학술원 내에서 공개적으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애초에 그가 여자를 옆에 끼고 돌아다닌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새로운 여자친구 정도로 봤을 확률이 높았다. “굳이 라일리를 표적으로 노렸어. 그게 인질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저 라일리를 단순한 연인 관계 정도로 생각하고 일을 꾸미지는 않았겠지. 수없이 갈아치운 내 연인 자리의 인물이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는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요.” “그리고 그들은 라일리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지. 심지어 여유롭게 시간까지 끌었어. 이것부터가 이상하잖아, 이미. 인질로 활용하기 위한 납치 같지는 않았어. 인질로 활용하고자 했다면 내게 접촉했겠지. 만약 납치가 인질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순히 라일리에게서 뭔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면…….” “…….” “아주 높은 확률로 내 스승을 죽인 그놈들이겠지. 스승님은 내게 그놈들에게서 라일리를 보호하라고 했으니까. 그놈들은 스승님의 우려, 그러니까 라일리가 가진 ‘뭔가’를 알고 있는 부류일 거고. 아마 그 자리에서 라일리가 가진 뭔가를 확인하려 했고, 또 확인했다면…….” “……작정하고 아가씨를 노리겠네요.” “그 시작은 역시 물밑 작업이겠지. 라일리의 주변 인물들부터 차근차근 공략해가며 기회를 엿볼 거고 꽤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어 라일리에게 접촉할 거야.” “그 시작이 라이언 남작이란 말씀이시군요?” “라이언 남작은 이러나저러나 라일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 사이니까. 차근차근 연결점을 쌓아가겠지. 그리고 라이언 남작과 그들의 연결점을 에르메인츠 백작이 이어 준다고 생각하면 이 상황도 대충 납득이 가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갔다. 기브넨은 끙,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젖히고 축 늘어졌다. “머리 아프네. 뭐, 내가 너무 나간 걸 수도 있고.” “그래도 가능성 있는 가설인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계속 잘 살펴봐. 수상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하고.”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삭이 나가고 기브넨은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 위에 라일리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지금 뭐하고 있을까. 열심히 학술원 강의를 듣고 있을까. 강의를 듣는 그녀의 모습은 어떨까.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이 궁금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네.” 곁에서 쫑알쫑알 시끄럽게 굴던 때가 그립다. 이렇게 서류더미에 처박혀 업무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더더욱. 그녀가 종일 붙어서 간호하던걸 싫은 척했지만 싫지 않았지. 진드기처럼 붙어 있는 그 모습이 꽤 귀엽기도 했고. 그때 짜증 내지 말고 좀 더 잘해주고, 더 많은 걸 즐겼어야 했는데. 기브넨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독이나 한 번 더 먹을까.”   *** 리즈는 저택 일에 잘 적응했다. 물론 여전히 눈치를 보긴 했지만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고 움직였다. 기브넨은 생일을 앞두고 더 바빠진 듯했다. 못 본 지 꽤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생일파티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날 하루 종일 볼 수 있으니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반이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는 예전처럼 두문불출했다.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뭐, 언젠가 또 불쑥 갑자기 나타나겠지 싶어 반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생일 파티까지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건만, “근데 너 생일선물은 뭐 준비했어?” 힐라가 무심코 던진 질문 하나에 평온함이 박살이 났다. ‘서, 선물……!’ 리즈 일을 신경 쓰고, 학술원 수업 공부에 집중하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아르페지오에게서 개인교습을 받는 등 바쁘디 바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뭐야, 선물도 준비 안 한 거야?” “……잊고 있었어.” “뭐? 어떻게 그걸 잊어!” “너무 정신이 없어서…….” 뭔가 계속 찜찜한 느낌을 받고 있긴 했다. 왜 찜찜한지 그 원인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뿐이지. “당장 내일인데 너! 어휴, 얼른 선물 준비해.” 뭘 선물로 줘야 할까. 라일리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뭐든 고맙다고 잘 받아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축하하는 생일인데 좀 더 의미 있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간 신세 진 것도 많고, 언제나 고마운 것들만 투성인데 정작 그에게 해준 게 없는 것 같다. 그는 선물을 자주 툭 던져놓고는 했는데, 항상 그를 위한 선물을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면서도 실행을 하지 못했다. ‘뭘 선물해야 좋지…….’ 남의 생일 선물을 챙긴 적은 아버지와 단둘이 산에서 살던 때뿐이다. 그땐 나이가 어려서 선물이라는 것도 대충 산에서 열매를 주워 갖다주거나 아랫마을에 내려가 아버지 선물이랍시고 여자아이용 헤어핀을 사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 선물 같지도 않은 선물이 전부이기는 했다. “라일리. 같이 가고 싶은데 미안, 오늘은 일이 있어서.” “괜찮아. 그럼 나 가볼게.” “응. 조심하고, 내일 보자!” 강의가 끝나고 라일리는 대광장으로 향했다. 번화가 상점들을 구경하다 보면 선물할 만한 것들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다. 용돈 및 생활비 명목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을 쓸 일이 없다 보니 오히려 넘치는 수준이었다. 라일리는 넋 놓고 상점의 쇼룸을 구경했다. 기브넨에게 줄 만한 것들이 있나 살피면서. 사실 남자들은 뭘 받으면 좋아하는 건지, 그들이 어떤 물건들을 애용하는 건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라 상점을 구경할수록 혼란만 커졌다. 그렇게 구경, 고민, 구경, 고민을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보통 체격의 남자가 라일리에게 다가와 부딪히더니, “앗!” 라일리가 들고 있던 가방을 통째로 훔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라일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넘어졌다. ‘내 돈!’ 순식간에 벌어진 날치기 현장에 넋을 놓을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라일리는 미친 듯이 남자를 쫓기 시작했다. “도둑이야! 도둑 좀 잡아줘요!” 라일리가 간절하게 외쳤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법이 없었다. 일단 날치기 남자는 평생 날치기만 전문업으로 해온 건지 발이 굉장히 빨랐다. 감히 쫓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속도였다. 남자가 점점 멀어지면서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눈에 띄게 벌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라일리는 계속 달렸다. 당장 내일이 기브넨의 생일파티라 오늘 반드시 선물을 준비해야 했으니까. “이봐, 아가씨 위험해!” “멈춰요!” “꺄아아악!”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명이 내지르는 위협과 비명이 귓가에 때려 박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척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마차였다. 사람이 많은 광장에선 지정된 마차의 속도가 있건만, 라일리를 향해 돌진해오는 마차는 어딘가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마차를 본 순간 라일리는 마차에 치여 날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피가 낭자한 그 충격적인 상황이 떠오르자마자 숨이 턱 막히고 몸이 굳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엉엉 울던 기억이 시야를 점령했다. 그렇게 피할 수 없을 만큼 마차가 가까워진 그 순간. “뭐 하냐고, 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누군가가 라일리의 스타베팅 확 잡아당겼다.   라일리의 몸이 종잇장처럼 힘 없이 끌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마차가 지나쳤다. 라일리는 과호흡이 온 건지 입을 틀어막으며 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흘렸다. “야, 정신 차려! 야 왜 이래 너!”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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